아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던 '중꺾마' 정신, 영화가 알려주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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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농구 경기장 인생을 농구 코트라 생각하고 한 번 덤벼보는 거야! |
ⓒ 조영지 |
14살 아들은 운동을 무척 좋아한다. 축구, 야구, 배구, 배드민턴, 복싱 등 가리지 않고 수많은 운동을 해왔다. 그러다 이제는 한 가지 운동에 정착을 했는데 그것은 농구이다.
농구공을 튀길 때 '투웅투웅' 소리와 골대에 슛이 들어가는 순간의 짜릿함이 좋다고 했다. 처음엔 사내아이들의 흔한 놀이 정도로만 생각했는데 정도가 점점 심해지더니 급기야 주니어 농구단에 입단하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운동이라곤 숨쉬기 운동밖에 안 하는 엄마는 이럴 때 좀 당황스럽다. 아이가 하는 말이 거의 외계어처럼 들리기 때문이다.
"엄마, 이번에 ○○선수가 FA에 나왔는데 몸값이 억대래."
"저 선수, 레이업 슛이 완전 멋지지?"
나는 그 선수가 누군지도 모르고 레이업 슛은 또 뭐지? 같은 생각을 한다. 신나게 떠들었는데 호응이 영 미적지근하자 아들도 점차 말수를 줄여나갔다. 사춘기 아들과의 거리를 좁혀보겠다고 딴은 열심히 농구 공부를 했다. 주말에 같이 경기를 보러 다니고, 농구 기술과 선수 이름도 외워가며 조금씩 농구 지식을 쌓아 나갔다(레이업 슛은 달리며 넣는 슛이었다).
<슬램덩크> 보러 영화관으로 출동!
▲ '더 퍼스트 슬램덩크' 영화 <더 퍼스트 슬램덩크> 보도스틸. |
ⓒ 에스엠지홀딩스㈜ |
그러던 어느 날 우리 사이를 급격히 밀착시켜 주는 일이 생겼다. 바로 영화 <더 퍼스트 슬램덩크>가 개봉한 것이다. 운동이라면 잼병인 나지만, 영화나 책이라면 얘기는 다르다. 한때 강백호에게 빠져 슬램덩크 전 권을 섭렵한 이가 나이기 때문이다.
개봉과 동시에 나는 가족을 모두 이끌고 영화관으로 출동했다. 아들에겐 새로운 농구 드라마를, 남편에겐 향수를 불러일으키기에 좋을 것 같았다. 새침데기 딸이 걱정이었지만, 웬걸? 스크린에 얼핏 설핏 나오는 서태웅을 보며 입덕을 하겠다나 뭐라나.... 어쨌든 슬램덩크는 가족 영화로 아주 좋은 선택이었다.
'포기하는 순간, 경기는 끝난다.'
'여기는 자네의 무대입니다.'
'니들의 그 잘난 농구 상식은 나에게 통하지 않는다. 난 초짜니까!'
가슴을 울리는 이 명대사들은 중학생이 된 아들에게 내가 해주고픈 말들이기도 했다. 관람을 마치고 나오며 아들의 손을 잡았더니 손이 축축이 젖어있었다. 주인공팀이 질까 봐 너무 조마조마했다고 한다. 전혀 이길 가능성이 없는 팀이 승리를 이뤄가는, 짐짓 뻔하면서도 감동적인 내용은 두고두고 대화거리로 이어지기도 했다.
<슬램덩크>를 보고 난 후 아들의 농구사랑은 더 심해졌다. 그런데 영화의 영향을 받은 건 우리 아이만이 아니었나 보다. 평소 농구에 관심이 없던 아들 친구들도 농구를 같이하자며 시도 때도 없이 연락을 해왔다. 농구의 인기는 중학교 동아리 모집에서 더욱 도드라졌다. 학년 초, 동아리 모집에서 농구부의 인기는 처음으로 방송부를 앞질렀다고 했다(아들은 높은 경쟁률 때문에 탈락했다).
지더라도 의미가 있습니다
▲ 아들의 농구 사랑 국영수 학원은 안 다녀도 농구 수업은 빼먹지 않는 아들. |
ⓒ 조영지 |
나는 <슬램덩크>의 인기가 반갑고 고맙다. 떡 본 김에 제사 지낸다고 나는 이참에 아이들이 스포츠 정신에 대해 생각해 보는 기회가 됐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사실 요즘 아이들은 애당초 안 될 거라는 가정 하에서부터 시작하는 경우가 많다.
"전 공부를 못해서 안 될걸요?"
"금수저 애들보다 더 잘될 수가 없죠."
"저는 선행을 안 해서 따라가기 힘들어요."
할 수 있다는 긍정의 마인드보다 자신은 안 될 거라는 수만 가지 이유를 마음 밑바닥에 품고 살아간다. 스포츠 정신이란 무엇인가? 슬램덩크의 핵심은 무엇인가? 바로 중꺾마! '중요한 건 꺾이지 않는 마음' 아니겠는가. 단순한 유행어로써가 아니라 진정한 중꺾마의 정신을 깨쳤으면 하는 바람이다.
실제로 농구 경기를 관람하다 보면 선수들이 한 경기에 쏟아붓는 에너지가 어마어마하다. 또, 경기의 흐름을 종잡을 수 없는 경우도 많다. 모두가 졌다고 단념하는 순간에 역전승을 이뤄내는 경우도 있다.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 그래, 이것! 내가 아이들에게 말해주고 싶은 것이다.
하지만 아이들의 마음이 이해가 안 되는 것도 아니다. 그들이 가벼운 도전조차 두려워하는 건, 앞서 나간 선배들의 길이 그리 녹록지 않아 보여서일 것이다. 사회의 수많은 불의를 간접 경험하며 이미 지쳐버린 탓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스포츠 정신을 탑재한다면 어떨까? 인생을 농구코트라 생각하고 강백호처럼, 송태섭처럼, 정대만처럼, 채치수처럼 무모해 보이더라도 도전한다면.... 상황은 또 달라질 수 있지 않을까?
설령 경기에서 진다해도 상관없다. 종종 아이들은 말한다. 어차피 안 될 거 무슨 의미가 있냐고. 하지만 그 과정이 의미가 없을 리가. 진 경기를 분석해 다음 경기를 준비하면 될 일이다(<슬램덩크>의 '북산고'도 매번 이기기만 한 것은 아니다). 참고로 사람들은 약자가 강자를 이길 때 더 큰 응원과 박수를 보낸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
그런데 영화에 너무 큰 의미를 부여하는 게 아니냐고? 스포츠니까 가능한 거 아니냐고? 무슨 말씀? 세상은 영화보다 더 영화 같고, 스포츠보다 더 반전 있는 곳이라는 걸, 늙은 우리는 알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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